인천은 인천 영사가 매음 행위에 대한 대책으로 유곽 영업 허가를 요청하였지만 외무성은 인천에는 일본인 외에도 다른 외국인이 있으므로 체면상 유곽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부도정에 유곽이 조성되어 부도유곽이 1902년 12월 영업을 시작했다. 부도유곽의 입지 조건을 살펴보면, 당시 인천 일본인 거류지 동남쪽 끝에 조성되었으며, 유곽 북쪽은 산으로 남쪽은 바다로 막혀있고 동쪽은 일본인 시가지 끝이었으므로 부도유곽은 삼면이 주변과 격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07년 4월 인천 만석동에 제2유곽을 만들고 싶다는 청원이 인천이사청에 제출되었다. 이사관은 거류민회에 이 문제에 대한 자문을 요청했고, 거류민회에서는 찬반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제2유곽 부설 찬성 쪽은 저렴한 유곽을 부설하면 하층민의 성병 감염을 예방할 수 있으며, 부도유곽이 당시 인천의 동쪽에 있었으므로 서쪽에 제2유곽을 설치하여 인천의 균등한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설 반대 쪽은 만석동은 인천의 입구이므로 유곽을 설치해서는 안 되고, 당시 인천에는 한 곳의 유곽으로도 충분하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거류민회에서는 만석동이 유곽을 만들기에 적당한 곳이지만 두 번째 유곽은 시기상조라고 결론지었다. 러일전쟁 이후 부도정 인근 화정에 조선인 소요리점이 조성되었다. 조선인 소요리점의 규모는 부도유곽과 비교해도 작지 않았을 정도였지만, 인천 경찰의 사창 단속과 불경기로 인해 부도유곽으로 이전하기로 결정되었다. 1915년 이전에 조선인 소요리점 의 부도유곽 이전 작업이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Hyeon Park (Thu,) studied this ques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