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쿠데타세력의 정치세력화 및 선거와 정당을 통한 통치로의 전환과정에서 창당된 민주공화당은 공식 창당 전부터 김종필과 대의·사무조직으로 이원화된 조직체계를 둘러싸고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1963년 범국민정당운동과 6대 국회의원선거를 거치면서 공화당의 인적구성은 창당 때보다 다양해졌고, 이는 당내 권력구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제3공화국이 출범한 후 공화당 내에서는 사무국조직의 강화와 우위 원칙을 고수하려는 친김종필계 주류파와 사무국조직 축소 및 대의당원의 지위를 강화하려는 반김종필계 비주류파 간의 치열한 권력투쟁이 진행되었다. 1964년 3월부터 시작된 대규모 한일협정 반대시위는 연이은 권력형 비리, 학원사찰 폭로와 맞물려 반정부시위로 발전했고, 박정희정권은 민정 복귀 후 집권 첫 해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집권세력 내에서는 위기 타개를 위해 김종필의 퇴진과 공화당 재편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6·3 비상계엄 선포 직후 김종필은 당의장직을 내려놓고 두 번째 ‘외유’에 나섰다. 김종필의 부재 동안 공화당 주류파는 계엄 해제를 위한 협상에서 대야 강경노선을 고수하며, 상대적으로 온건한 정국수습 방안을 추진하던 비주류계를 견제했다. 주류계와 비주류계의 정국수습에 대한 이견은 야당과의 협상에도 영향을 주었다. 한편 1964년은 박정희와 공화당 간 관계 정립의 사실상 출발점이었다. 공화당은 제3공화국 출범 때부터 박정희에게 공화당 출신의 내각 기용으로 진정한 ‘정당정치’를 구현할 것을 요구했으나, 박정희는 이를 전적으로 수용하려 하지는 않았다. 박정희는 공화당 지도부의 구상과 달리 이미 집권 첫 해부터 당과 행정부를 분리하고, 당이 행정부의 정책 수립이나 집행에 개입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1965년 12월 김종필이 당의장직에 복귀하고 당정연석회의가 정례화 되었지만, 정책 수립에서 공화당이 소외되는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6·3계엄정국은 박정희정권이 직면한 정치적 위기에 어떻게 대응하는 지를 보여주는 시험대였다. 동시에 향후 국정 운영의 방향성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1964년은 대화와 설득, 그리고 협상을 통한 정치적 조율은 점 차 배제되고, 행정력 중심의 일방적 통치가 우선시되는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이는 박정희정권이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저항을 제도적 절차나 정당정치의 틀 안에서 해결하기보다, 군대라는 물리력을 기반으로 국가권력의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 통제하려는 경향을 강화한 계기로 해석할 수 있다.
Hyun Seok Kim (Wed,) studied this ques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