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 중심의 수사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지금껏 이어오고 있지만, 정동적 양극화와 혐오 담론이 지배하는 현대의 소통 위기에 충분히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 소통이 실패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설득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선행 조건들이 붕괴했기 때문이다. 이 글은 한국의 고유어 ‘품’을 수사학의 주요 자원으로 삼아, 설득 이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탐구한다. ‘품’은 신체적 포용 공간, 포용 행위, 공동체적 노동 교환(품앗이), 존재의 질적 수준(품격)이라는 네 가지 의미 층위가 하나의 의미론적 연속체를 이루는 개념이다. 품격은 품의 목표가 아니라 실천의 흔적이라는 역설이 이 연속체의 핵심이다. 이 분석을 바탕으로 이 연구는 ‘품의 수사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품의 수사학은 말이 시작되기 전에 소통의 마당을 여는 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토포스가 논증의 말터라면, 품의 마당은 그보다 앞선다. 이 마당은 선행성(先⾏性) · 관계성 · 역동성이라는 세 이론적 특징을 지닌다. ‘품의 수사학’은 안심(安心)-환대(歡待)-공명(共鳴)의 삼중 체계로 펼쳐진다. 안심의 품은 블루멘베르크의 수사학적 인류학을 토대로, 명증성이 결여된 세계에서 인간이 구성하는 존재론적 안전의 공간이다. 환대의 품은 페렐만의 보편 청중과 부버의 나-너 관계를 통해 타자를 윤리적 주체로 승인하는 수사학적 실천이다. 공명의 품은 버크의 동일시를 넘어 괴테의 양극성과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를 통해 차이를 해소하지 않으면서 함께 울리는 정동적 사건으로 정의된다. 세 층위는 순차적 단계가 아니라 서로를 강화하는 순환적 구조를 이룬다. 안심이 무너지면 환대는 연기(演技)가 되고 공명은 선동으로 전락한다. 이 삼중 체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에토스-로고스-파토스가 설득의 수단을 체계화한 것과 달리, 소통 자체가 가능하기 위한 선행 조건들을 이론화한다.
Tschong-young Kim (Thu,) studied this ques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