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파독립 이후 본격적으로 일본 국내에서의 교세 확장을 도모해 가며 1902년 한국에 진출한 금광교의 초기 한국포교는 그 외의 종교와는 다른 전개 양상을 보인다. 개인 포교자에 의해 시작된 금광교의 한국포교는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진출한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개인 포교자의 미신 행위로 인해 통감부의 탄압을 받았다. 또한, 금광교의 초기 한국포교 시기는 독립교단으로서의 사회적 기반 정비기와 중복되어 한국포교관리자에 대해 원조할 수 있는 조직적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종교선포에 관한 규칙’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못하여 결국 한국포교관리소 사무 중지 신고라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금광교는 음사교라는 부정적 시선 및 본부와 한국포교관리자와의 갈등이라는 내부 분규 그리고 그로 인한 한국포교관리소의 존폐 위기를 타파하기 위하여 무신조서 봉독식을 거행하고 그 사실을 통감부에 문서로 보고하는 등 국가 시책에 즉응하는 태도를 적극적으로 표명하고 있다. 한일병합 전의 한국에서의 무신조서 봉독식은 금광교에 있어 포교 목적인 순교를 하면서 교세 확장도 하고, 국민통합 정책을 펼치던 메이지정부에 ‘자주적’으로 협력하는 교단으로 인식 개선도 도모하면서 한국포교를 둘러싼 실태(失態)를 만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Sekyung Choi (Tue,) studied this ques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