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거란의 관계 유지에 사신들이 크게 기여하였다. 정기 사신 중 고려 국왕과 거란 황제의 생신을 축하하는 생신사·절일사 사례가 가장 많이 확인된다. 군주의 생신 하례가 외교 수단으로 활용된 것은 1004년 전연의 맹이 맺어진 이후에 거란과 송 양국 사이에 시작되었다. 생신사는 거란과 송 양국의 대등한 외교 관계의 산물로 교빙의 성격을 가짐으로써 조공체계에서 유래하여 위계질서를 의미하던 하정사와 달랐다. 고려는 동아시아의 일원으로서 당시 재편된 국제질서에 합류하였고, 거란에 총 37회의 절일사를 보냈다. 이는 숙종대 이전과 이후로 분기하여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현존하는 기록에 의하면 숙종대 이전에는 절일사가 정기적으로 파견되지 않았으나, 숙종대 이후에는 거의 매년 보내졌다. 이에 1022년 규정을 고려 대거란 사행의 고정 지침으로 보는 데 무리가 있다. 이 지침은 問候使의 파견 방식에 대한 규정과 사행을 간소화하는 규정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동시에 숙종대 절일사 파견의 변화는 숙종의 ‘北交南事’ 외교정책과 연관된다. 이 표현은 태조의 대외정책에 대한 평가, 그리고 문종대의 실제 대외정책에서도 찾아진다. 숙종대에는 절일사를 포함한 교빙 수단을 활용하여 거란과의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숙종이 거란과의 관계를 ‘交’로 표현하였다. 반면, 숙종이 송의 은밀한 책봉 제의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송의 불만을 우려하였고, 송과의 왕래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도 필요하였기에 송에게는 예로써 높여주고자 하는 바람으로 송과의 관계를 ‘事’로 정리하였다. 이처럼 숙종대 외교정책은 거란 혹은 송과 개별적인 외교 관계를 맺어야 하는 초기 단계를 넘어, 이미 형성된 두 강대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를 공고히 다지고 그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춘 외교 책략이었다. 숙종대 이후 고려의 대거란 절일사 파견이 정기적으로 이뤄진 것은 바로 이러한 대외정책의 산물이었다.
Yao Wang (Wed,) studied this ques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