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吳希文(1539~1613)이 임진왜란을 맞아 피난 생활 속에서도 한양에 돌아올 때까지 9년 동안 각종 제사를 봉행한 양상을 검토한 것이다. 그는 당시 사대부들에게 가장 중요한 ‘봉제사 접빈객’을 적극 실천하였는데, 이 가문의 제사 설행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오희문 가문은 다른 가문들과 마찬가지로 忌日祭(忌祭)를 가장 중요시했다는 점이다. 그는 1592년 장인 부부의 기일제를 시작으로 그 다음 해부터 부친 吳景閔, 조부 吳玉貞, 증조부 吳繼善, 고조부 吳重老 및 외조부 내외 등 16명에게 총 65회의 기일제를 설행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부친과 고조부 등의 生諱日祭도 11회 거행하였다. 이는 같은 전쟁 상황에 있었던 경상도 琴蘭秀와 鄭慶雲가문의 제사보다 많은 횟수이다. 둘째, 이 가문은 특히 節日祭(節祀)와 4名日의 墓祭를 중요시했다는 점이다. 오희문은 13개의 각종 절기와 명일에 모두 67회의 차례를 지냈다. 그는 1593·1594년 단오·추석 때부터 차례를 올리다가, 1595년부터는 매년 주요 절기마다 평균 10~11회 정도 봉행하였다. 특히 그는 설날(正朝)·한식·단오·추석 등 4명일에는 廣州土塘里의 묘소를 찾아 20회 省墓하였다. 1595년부터 성묘한 가운데 1597년 2월 평강 이주 이후에는 매년마다 거행하였다. 이 가문의 묘제는 당시 조상들의 ‘혼백’을 직접 뵈알하려는 의식이 강한 가운데 주자 『가례』와 ‘절충한 모습’을 보였다고 하겠다. 이처럼 그의 가문은 전쟁 상황 속에서도 1592년 2회의 기일제를 시작으로 매년 20회 이상 각종 제사를 올렸으며, 1598년에는 무려 29회 제사하는 등 9년 동안 총 163회, 매년 평균 18.1회 제사를 봉행하였다. 이는 금란수와 정경운의 9.3회와 4.3회와 비교할 경우 평균 2~4배인 동시에 이문건의 사례보다 많았다. 이는 전쟁 당시 한양의 사대부가 피해가 컸던 경상도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유교적 의례를 실천한 사례라고 하겠다. 셋째, 오희문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宗孫을 대신하여 제사를 거행했다는 점이다. 원래 이러한 제사는 그의 담당이 아니고 종손의 책임이었다. 그는 이들이 피난하다가 갑자기 죽어 제사의 봉행이 불가능할 것을 우려하여, 비록 支孫이었지만 제사를 대신 봉행하였다. 하지만 1600년 10월 이후에는 종손 계열이 제사를 봉행한 사실을 알고 그만두면서 다시 〈輪次記〉를 작성하여 윤회봉사하도록 분담시켰다. 그만큼 당시 제사는 종손이 죽고 전쟁 중에도 결코 멈출 수 없는 가장 중요한 ‘孝의 적극적 실천’이었던 것이다. 넷째, 이 가문은 오늘날과 달리 이른 아침에 제사를 지냈고, 제물과 그 절차 역시 평소와 달리 간소화와 융통성을 보였다는 점이다. 제사는 한밤중인 자정에 지내지 않고 해가 뜬 직후 이른 아침에 거행하였으며, 제물은 주로 밥과 국, 떡과 국수, 생선과 탕 등 간단하게 진설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해 처음 수확한 농산물과 새로운 음식이 있으면 먼저 가묘에 천신하였다. 이러한 이 가문의 제사 관행은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 가문의 제사는 종법의 수용과 주자 『가례』의 보급 이후에도 윤회봉사의 관행이 지속된 가운데, 점차 宗孫(長子)을 중심으로 한 4대 봉사로 전환되는 ‘과도기적·절충적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양반 사대부의 제사는 전쟁 상황 속에서도 잠시도 멈출 수 없는 중요한 ‘효의 실천’인 동시에 ‘의무’이자 ‘일상’이었다. 이러한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 따른 다양한 제사의 사례 연구는 조선 후기 각종 예서 편찬과 예학 발달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Eui-hwan Kim (Wed,) studied this ques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