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법랑철기산업이 성장하게 된 배경과 과정 그리고 이로 인한 조선법랑철기업계와 일본법랑철기업계 간 갈등을 분석하였다. 한일병합 이후 중앙시험소에서 법랑철기 생산을 시작하고 민간에서도 조금씩 생산을 시도하면서 인지도가 높아지기 시작하였으며, 조선총독부 요업정책의 결과로 법랑철기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특히 1930년대 우가키 총독의 ‘조선공업화’ 정책과 중앙시험소의 지속적 연구, 부산지역의 인프라 확충이 결합되면서 조선법랑철기산업은 본격적으로 성장하였다. 조선법랑철기산업은 재조일본인을 위시한 ‘조선자본’을 주축으로 성립되었으며, 일부는 조선총독부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지원을 획득했다. 그러나 조선법랑철기산업의 급속한 성장은 일본법랑철기 수출에 손해를 입혔다. 낮은 가격과 높은 수출량은 일본산 제품의 가격경쟁력을 위협했으며, 무수출검사제로 인한 저품질은 일본제품에 대한 신뢰도를 훼손시켰다. 특히 오사카의 법랑철기 수출업자들에게 직격타를 입혔는데, 이에 오사카의 경제인들을 중심으로 일본내각을 통해 ‘중요산업통제법’이 조선에도 확대 적용되도록 조선총독부를 압박했다. 한편 오사카의 ‘서방법랑철기공업조합’을 중심으로 조선 측 법랑철기업자들과 협의를 추진했으나 조선총독부와 조선 자본가들의 강력한 반발로 통제의 일원화에는 실패하였다. 대신 생산량 할당과 수출검사제 도입 수준에서 타협이 이루어졌으며 끝내 품종제한에 이르지는 못했다. 조선법랑철기 생산통제 문제는 단순한 ‘일본내각·일본자본’과 ‘조선총독부 ∙ 조선자본’의 대립이 아니었다. ‘조선공업화’ 정책으로 인한 ‘산업클러스터 이동’ 현상은 오사카와 조선(부산) 간 실질적 산업 경쟁을 야기했으며, 이것이 조선법랑철기 생산통제 문제의 핵심 요인이었다. 즉 조선공업의 발전은 일본(오사카)과 조선의 경제관계가 ‘생산자-소비자’에서 점차 ‘경쟁자’로 변화시켰고, 조선법랑철기산업의 성장과 그에 따른 생산통제 문제는 이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실증사례이다.
Dong-Hoon Choi (Wed,) studied this ques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