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고중세 중국의 屯田이 국가 운영에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를 간략히 살펴보고 신라의 둔전과 비교하여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신라 둔전의 기능을 고찰하였다. 먼저 종래에 신라 둔전의 사례로 제시된 『日本書紀』 계체조의 “久禮山戍” 기사, 〈단양적성비〉의 赤城佃舍法, 8세기 이후 패강 이남 지역 개척 사례 등을 재검토하였다. 이를 통해 신라의 둔전은 6세기 전반부터 확인되며 경계공간의 군사시설 인근에 개발되어 戍兵이 직접 경작하는 軍屯의 성격임을 밝혔다. 그러나 경계공간이 신라의 영역으로 편제된 후에는 기존의 屯田은 〈단양적성비〉에서 볼 수 있듯이 公田에 속하여 재지사회의 노동력으로 佃作되거나 유공자에게 분여되었다. 8세기 중반 이후 신라에서는 패강 이남 지역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屯田이 설치되었다. 패강진 두상대감의 별칭이 都護였던 이유는, 鎭撫와 屯田 경영이라는 唐代 都護의 역할이 기대되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국가재정을 총괄하던 집사시랑이 패강진 두상대감으로 轉任된 사례가 다수 확인되는 점은, 동시대 唐의 判度支가 屯田을 관할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屯田의 수익을 중앙재정으로 귀속시키려 했던 신라 정부의 의도를 반영한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신라의 둔전은 영역 확장과 公田 확보의 방법이자 중앙재정에 기여하는 營田의 성격으로 발전하였다. 신라의 둔전은 영역화 전략을 넘어 국가재정의 재원으로도 기능했으며, 나말여초의 변혁을 거쳐 고려의 토지제도에도 영향을 끼쳤다.
Mi-Ran Lee (Tue,) studied this ques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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